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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흔적/매체기고

안철수 열풍, 공감능력 가진 기성세대에 대한 열광

* 이 글은 격주간지 <기획회의> 308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20대와 30대·40대는 박원순 시장에게 표를 몰아줬다. 30년의 세대 차를 넘어 하나가 된 셈이다. 그들의 불만과 분노가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들었고, 20~40대를 잇는 하나의 공통점은 ‘불안(不安)’이었다.”

조선일보 10월28일자 1면 기사 중 일부다. 안철수 열풍을 가장 잘 설명한 기사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10·26 서울시장 재보선 기간 내내 안철수 열풍 차단에 주력한 조선일보지만 진단만큼은 정확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과 안철수 열풍이 무슨 상관이냐.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상관있다. 안철수 열풍은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다. 근원을 쫓다보면, 가깝게는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부터 멀게는 IMF 외환 위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쉽게 말해 90년대 말부터 사회경제적 불안 요인이 누적됐고, 이로 인해 기존 체제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불만 기류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누적된 불만과 변화에 대한 욕구가 ‘안풍’의 요인이 되면서 결국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공감능력을 가진 ‘새로운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세대의 화답

물론 그것이 최근 조직적 열풍으로 이어진 이유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힘 때문이다. 대중들의 불만이 SNS를 통한 투표참여와 결합되면서 현실적인 힘으로 표출됐고 그것이 지금의 안철수 열풍을 만들어 냈다는 얘기다. 

박경철·조국 신드롬, 박원순 서울시장 등장, ‘나는 꼼수다’ 열풍도 따지고 보면 모두 안철수 열풍과 연결돼 있다. 안철수 박경철 조국 박원순 김어준 등 젊은 세대의 멘토로 등장한 이들은 비슷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건 바로 젊은 세대에 이런 저런 ‘지적질’을 하기보다는 그들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안다는 것.

민주화 이후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과 일상적 불안에 허덕이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이들에게 환호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안풍’의 이런 특징은 안철수 열풍을 안철수 ‘개인’만 주목해서 바라볼 경우 열풍의 근원을 제대로 진단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대중들의 안철수에 대한 지지는 공감능력을 소유한 ‘새로운 기성세대’에 대한 청춘들의 열광으로 해석하는 게 적절하다는 얘기다.

안철수 열풍에 대한 기성언론의 진단은 그런 점에서 여전히 ‘정치공학적’인 틀에 머물러 있다. 안철수가 갖는 영향력이 내년 총선과 대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열풍의 근원을 보지 못하고 그것이 갖는 현실적인 힘에만 주목하고 있다. ‘제3 정당 창당’ ‘박근혜 vs 안철수’ ‘안철수 대통령’ 등과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점과 무관치 않다. 반쪽자리 분석이다.

안철수 열풍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감성적인 면과 현실적인 측면, 이렇게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감성적인 요인에 지나치게 이성적인 잣대를 들이대거나, 현실적인 분석이 필요한 사안에 이상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

감성적인 면에서 안철수 열풍은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저)의 성공과 비슷한 점이 많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올 한해 가장 많이 팔린 책 가운데 하나지만 인문사회과학적인 완결성을 적용하면 한계가 뚜렷한 책이기도 하다. 20대가 겪고 있는 아픔의 구조적인 모순과 제도적인 측면에 대한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런 점을 근거로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비판했다.

타당한 분석이지만 20대로 상징되는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이 언급한 것처럼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인문사회과학적인 성찰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사회상을 정확하게 읽은 기획의 힘 때문에”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쉽게 말해 사회과학적 분석이 아닌 공감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젊은 세대의 주목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안철수 열풍도 비슷하다. ‘안풍’은 현실정치 논리나 정치 일반론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한계가 분명하다. 현재의 열풍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지도 장담할 수 없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지금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지만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에 대해선 검증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보수언론이 빨리 정치권으로 들어오라며 안철수 교수를 압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안철수 열풍에 대한 이런 식의 진단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심각하게 바라봐야 할 것은 기존 정당들이 무지할 정도로 ‘무공감능력’ ‘무감동’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선거에서 정당정치 위기론이 나올 정도로 기존 정치권은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헤매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계속 헤매는 한 안철수 열풍의 생명력은 더 빛을 발할 것이다.

안철수 열풍은 안철수 ‘개인’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

안철수 열풍은 정책만으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는 시대가 지나갔다는 점도 보여준다. 비정규직의 고달픈 인생과 ‘알바인생’에 버거워하는 젊은 세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정책을 생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과 영화배우 김여진이 그랬고, ‘나는 꼼수다’의 김어준도 그랬다. 그들은 20∼30대가 겪고 있는 아픔에 공감했고 ‘고소영’으로 상징되는 권력자들을 풍자하고 조롱했다. 이 모든 것이 안철수 열풍의 도화선이 됐다.

그러니까 안철수 열풍은 자신들에 대해 공감능력을 보여준 멘토들에 대한 젊은 세대의 화답인 셈이다. 기성세대나 정치권이 보여주지 못한, 기존 정당의 ‘무공감능력’ ‘무감동’이 빚어낸 반작용적 성격이 강하다. 안철수 개인에 대한 맹목적 지지가 절대 아니라는 거다.

안철수 열풍이 감성적인 공감으로만 그쳤다면 지금과 같은 열풍으로 이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20∼30대 유권자들이 최근 선거에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을 응징하는 투표행태를 보이지 않았다면 사회적인 반향으로까지 연결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

이 말은 ‘안풍’이 기존 정치권을 위협하는 수준의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성언론이 안철수 교수를 중심으로 한 ‘제3정당 가능성’과 그의 대선출마 가능성을 계속 거론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20∼30대 ‘응징 투표’가 반감투표에서 점차 대안투표로 전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지난해 6·2 지방선거와 지난 4·27 보궐선거(성남 분당을)에서 ‘반MB·반한나라당’ 투표성향을 보였다. 그런데 무상급식 찬반투표를 거치면서 조직적인 투표행태를 보이더니 이번 서울시장 재보선에선 ‘안철수와 박원순’이라는 분명한 대안에 지지를 표명했다. ‘반MB·반한나라’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대안을 고민하는 쪽으로 투표행태가 변화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변하게 했을까. 불안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20∼30대 가운데 상당수는 현재 한국 사회 주변부 노동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0∼40대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20대의 상당수는 제대로 된 취업조차 하기 어려운 ‘알바세대’로 전락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이들의 희망이 불안으로, 불안이 절망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이들에게 삶의 용기를 북돋워주고 아픔을 어루만져 준 당사자가 바로 안철수와 박경철이다. 그리고 이들의 ‘공감능력’은 정치적 냉소주의에 머물러 있던 젊은 세대를 움직였다. 정확히 말해 무당파·부동층에 머물러 있던 불안한 20∼30대를 안철수와 ‘그의 지지자들’이 적극적 투표 행위자로 바꿔 놓았다. 지난 대선에서 보수 우위의 투표행태를 보였던 40대마저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등을 돌림으로써 ‘안풍의 위력’은 더욱 거세졌다.

20∼40대의 불안이 SNS와 만나 응징 투표로 이어지다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은 20∼30대 투표행태 변화와 ‘안철수를 비롯한 지지자들’이 현실가능한 정치세력이 될 수 있는지 여부만 주목한다. 의미 있는 분석이지만 여기에는 핵심적인 요소가 빠져 있다. 안철수 열풍을 가능케 했던 사회경제적 불안 요인과 변화 기류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조중동과 같은 보수신문이 ‘안풍’의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저변의 변화가 아니라 안철수 교수의 행보만 주목하고 있다.

안철수 열풍은 일상의 불안에서 탈피하고 싶은 20∼40대가 자신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희망을 찾는 과정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안철수 교수’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불안 요인을 기존 정치권과 기득권 세력들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제거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여러 요인들로 인해 지금의 안철수 열풍이 잠깐의 바람에 그치고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불안요인이 우리 사회에 계속 잠복돼 있는 한 ‘제2의 안철수’ ‘제3의 안철수 열풍’은 얼마든지 다시 등장할 수 있다. 20∼30대, 심지어 40대마저 왜 안철수에 열광하는지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사진(위)=중앙일보 2011년 11월15일자 2면>
<사진(중간)=한겨레 2011년 11월15일자 3면>
<사진(아래)=경향신문 2011년 11월15일자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