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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흔적/핫이슈

‘박근혜의 기자들’

정당 출입기자들은 자신이 출입하는 정당과 그 정당 소속 정치인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쓸 수 밖에 없는 압박을 강하게 느끼게 마련이다. 한국 언론 특유의 출입처제도가 빚는 비극이다. 기사를 한번 쓰고 말 일도 아니고 계속 얼굴을 맞대야 할 힘있는 취재원에게 ‘섭섭한 기사’를 쓰기 어렵다는 건 일종의 인지상정일 수도 있다. 여기에다 기자의 특종욕심, 여차하면 정계로 뛰고 싶다는 개인적 야망까지 덧붙여져 자신이 커버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기사를 양산해 오고 있는 것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일선 기자들의 이런 ‘경향’을 게이트키핑해야 하는 팀장과 부장, 편집국장 등이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것이 현재 한국의 언론지평이다. 특정 언론사가 감시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통째로 정치판의 선수로 나서고 있는 현실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결과다.

감시견역할 포기한 언론사와 기자들

짐작하듯 이런 현상은 여당 출입기자, 특히 <조중동>기자일수록 더 심하게 나타난다. 27일 조선일보 권대열․김봉기 기자가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이들은 새누리당 지도부가 현행 규정대로 8월20일 대선후보 선출 전당대회를 치르기로 의결한 것과 관련해 박근혜 전 대표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사를 썼다.

<박근혜, 고비때마다 ‘마이웨이’ 이번에도 통할까>(조선일보 6월27일자 4면) 제목의 기사는 대단히 ‘친박스러운’ 기사다. ‘비박(근혜) 후보’ 3인이 요청해온 전대 연기를 거부한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박 전 대표는 중요한 정치적 고비 때마다 이처럼 ‘원칙’을 내세워 돌파해왔다”고 평가한 것까지는 이해(?)한다고 치자.

하지만 다음과 같은 부분은 두 기자가 저널리스트인지 아니면 ‘박근혜 캠프 관계자’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박 전 대표는 완전국민경선제를 요구하는 비박주자들의 요구를 일부분이라도 수용하지 않으면 자신이 비판받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또 완전국민경선제든, 다른 어떤 경선 룰을 택하든 자신이 새누리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100%에 가깝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 하지만 박 전 대표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완전국민경선제가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박 전 대표는 완전국민경선제가 정당정치 원칙에 어긋나고, 돈선거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며, 역선택이 우려된다고 측근들에게 말했다.”

기사를 대신한 ‘멘트’

박 전 대표가 ‘박근혜식 마이웨이’를 하게 되면 비판받을 줄 알면서도 그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고수했다는 걸 두 기자는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박 전 대표의 ‘마음속’으로까지 들어가 버렸다. 오히려 이 두 기자보다 해당 기사에 인용된 김형준․신율 명지대 교수의 비판이 두 기자가 쓴 기사보다 훨씬 ‘공정’하고 설득력을 가진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원칙은 ‘보편적 원칙’이어야 하는데 박 전 대표의 원칙은 ‘편의주의적 원칙’으로 보일 수 있다”며 “박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공천심사위까지 구성하면서 당권·대권 분리라는 공정한 경선의 가장 큰 원칙이 무너진 상황인데 기존의 당헌 당규를 ‘원칙’이라고 하는 것은 '자의적 원칙'이란 비판을 들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 또한 “농구에서 원칙은 ‘손으로 골을 넣는 것’이라면 규칙은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며 “박 전 대표는 지금 원칙과 규칙을 구분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 권대열․김봉기 기자는 자신들이 써야 할 지적과 비판을 김형준․신율 교수의 멘트로 처리한 셈이다. 기사 속에 인용하는 외부자 멘트는 주로 기사를 쓰는 기자의 시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인데 이 경우는 주객이 전도된 기이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친박 대변인’ 자처한 <동아> 기자

그런데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에 비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동아일보 동정민 기자는 <박근혜, 2007년 경선 악몽… 非朴3인에 ‘뿌리깊은 불신’>(동아일보 6월27일자 4면)에서 박 전 대표가 원칙(?)을 고수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친박 진영의 입장을 동아일보 기자가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는 꼴이다. 일부를 인용한다.

“박 전 위원장은 2007년 경선에서 현장투표에선 이기고도 여론조사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뒤져 패했지만 결과에 승복했다. 당시 혁신위를 주도했던 친이(친이명박)계가 지금은 비박(비박근혜)이 돼 박 전 위원장에게 경선 룰 변경을 또 요청하고 있다. 친박 진영은 ‘경선 룰은 원칙의 문제를 넘어 신뢰의 문제다. 5년 전에 본인들이 정한 룰이 ‘이제는 내가 불리하니 고쳐 달라’는 것을 박 전 위원장으로선 납득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친박 진영은 박 전 위원장이 1등의 오만, 불통, 사당화 등의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완고하게 현행 룰을 고수한 데는 이처럼 ‘뿌리 깊은 불신’이 크게 작용했다고 해석한다.”

동아일보의 이 기사는 사실 ‘박근혜를 위한 기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조선일보 권대열․김봉기 기자는 박 전 대표에 우호적인 기사를 쓰면서도 박 전 대표를 비판하는 관계자 멘트를 기사에 반영했다. 최소한의 형식적인 기사구성 요건을 갖춘 셈이다.

하지만 동아일보 동정민 기자의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박 진영 관계자’들만 등장한다. 기사구성 요건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얘기다. 기사에 친박 진영 관계자만 등장하니 당연히(!) ‘박근혜를 위한 기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묻는다. 동정민 기자는 ‘박근혜의 기자’인가.

<경향><한겨레>만 ‘박근혜 사당화’ 비판

박근혜 새누리당 전 대표를 비판하는 기자는 전국단위 종합일간지를 기준으로 했을 때 경향․한겨레 밖에 없는 것 같다.

<원칙 지킨다는 박근혜, 대선길 ‘불통의 박근혜’ 부메랑 되나>(경향신문 6월27일자 3면)와 <친박쪽, ‘대선’은 길고 ‘불통’ 논란은 짧다?>(한겨레 6월27일자 6면) 외에는 박 전 대표에 비판적인 기사를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동아․조선일보가 박 전 대표를 위해 적극적으로 뛰고 있다면 나머지 언론은 침묵하거나 양비론적 기사를 통해 사실상 새누리당 경선 논란을 방관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목소리가 사라진 새누리당의 현 상황을 강하게 질타한 경향신문의 오늘자(27일) 사설이 돋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향은 “우려스러운 것은 박 의원의 일방통행에도 불구하고 다른 목소리는 찾아보기조차 힘든 당내 분위기”라면서 “일련의 과정에서 이명박 정권의 대표적 폐해로 지적돼온 ‘소통 단절’의 또 다른 이미지를 본다 … 상대에 대한 배려 없는 원칙 고수는 오만과 독선만큼이나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경향의 이 사설 논지를 한국 언론에 적용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