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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흔적/핫이슈

카다피에 저항한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해도 되는가

[수다떨기] 카다피에게도 최소한의 인권은 있다

모르겠다. 내가 예민한 건가. 정육점 냉동창고에 놓인 카다피 시신을 봤을 때 경악했다.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은 한 가지. “이 사람들 미쳤구나.” 국가과도위원회나 ‘반카다피’ 세력이나, 카다피와 전쟁을 하면서 모두 괴물이 됐구나. 이 생각이 지금까지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반카다피’ 세력의 위험성은 카다피를 사살할 때부터 감지됐다. 카다피의 범죄행위와 ‘그’를 마음대로 죽이는 건 별개의 문제다. 카다피의 범죄행위는 국제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것이 ‘그’를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죽여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게 상식이다.

전두환이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것과 ‘그’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건 결코 동의어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카다피가 자국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것과 ‘그’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건, 등치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카다피와 전두환에게도 최소한의 인권은 존재한다.

카다피 ‘범죄행위’와 카다피를 죽인 ‘범죄행위’는 같다

그 사회가 온전하고 이성적인 사회라면 독재자 카다피의 범죄행위는 법치의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 전쟁 중에 무슨 교과서적인 얘기냐고 반문할 수 있다. 진중권 씨가 오늘(25일) 한겨레 칼럼에서 언급한 것처럼 “카다피의 정치범들 역시 친위대의 손에 재판 없이 처형 당했”는데 “반대자를 재판 없이 처형한 자를 현장에서 즉결처분하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권 문제에는 교과서적인 원칙이 필요하다. 특히 전쟁이라는 ‘반인권적 상황’에서는 더욱 그래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어노선이기 때문이다. 진중권 씨의 위 칼럼에서 그 다음 대목을 주목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진 씨는 말한다. “아무 힘도 없는 노인에게 린치를 가하고, 사체를 질질 끌고 다니다가 정육점 냉동창고에 갖다 놓고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까지도 ‘정의’일까?”

만약 위와 같은 ‘정의’가 성립되는 사회라면 토막 살해범은 똑같이 토막 살해를 내서 죽여야 할 것이다. 강간범은 붙잡아서 강간을 해서 고통을 당하게 해야 할 것이고, 아동 성추행범 가해자의 경우 가해자의 아동까지 성추행하는 것이 ‘정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정의’일까.

혹자와 일부 언론은 리비아 과도위원회나 ‘반카다피 세력’을 시민혁명 세력 혹은 민주화 세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난 이런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들이 카다피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의미는 평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카다피의 ‘범죄행위’를 비판하는 세력이 그것을 단죄한다는 명분으로 비슷한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민주화와는 거리가 있다. 이건 ‘원초적 보복’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카다피 독재정권의 인권의식과 저항세력의 인권 의식은 ‘엇비슷’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24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리비아 시르테 마하리 호텔에서 카다피 지지자로 보이는 시신 53구가 발견됐다. 일부 시신은 뒤로 손이 묶인 채 총살된 모습이었고, 일주일 전쯤 호텔 정원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HRW는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가 이 범죄를 조사하지 못하면 카다피에게 맞서 싸운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는 의미”라며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사견을 덧붙이면, 인권의 관점에서 카다피 독재정권이나 ‘과도위’ ‘반카다피 세력’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독재정권에 대한 시위가 ‘도덕성’을 상실할 때 제대로 된 구심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카다피의 ‘반인륜적 범죄’를 단죄하기 위해 ‘그’를 반인륜적으로 대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국내의 복잡한 상황과 리비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역학관계가 맞물리면서 리비아는 자칫 무정부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점에서 리비아 사태를 전하는 국내 언론, 특히 조중동의 보도태도는 흥미롭다. 그들은 ‘리비아=북한’ ‘카다피=김정일’로 등치시키며 현재 리비아 상황과 북한의 미래를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조중동의 ‘반인권 포퓰리즘’ …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뭐 해석은 그들의 자유이고, 북한의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그들의 자유이긴 한데 문제는 흥분한 나머지 멀리 나간다는 점이다. 포퓰리즘이라면 치를 떠는 그들이 포퓰리즘의 극치를 내달리고 있다는 풍경을 지켜보는 게 … 뭐라 그럴까. 그들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다시 ‘리바이벌’ 하려 한다. ‘리비아식 천박한’(이 표현은 나의 개인적 평가다) 포퓰리즘 - 그러니까 카다피가 자신의 집권기간 동안 벌인 독재와 범죄행위 때문에 ‘반인권적 죽임’을 당하는 것이 정당화 된다면, 우리 사회에서도 정당화 될 수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보복을 장려하는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카다피의 죽음을 희화화 할 게 아니라 그 잔혹성과 천박함에 우려를 표명해야 한다.

<사진(위)=중앙일보 2011년 10월21일자 1면>
<사진(중간)=조선일보 2011년 10월21일자 2면>
<사진(아래)=동아일보 2011년 10월21일자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