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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흔적/곰돌카페

한국 대형마트 문제점 파헤친 언론인의 책이 없는 이유

[책으로 세상보기] 찰스 피시먼 지음ㆍ이미정 옮김/이상

<월마트 이펙트>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시장경제를 파괴하고 있는 거대 자본의 습격’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그런데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왜 한국에는 이런 책을 쓴 기자가 없을까’ ‘왜 한국에는 이마트와 롯데마트, 홈플러스와 같은 대형 유통업체를 정면으로 파헤치는 책이 나오지 않는 걸까.’

내가 11년 동안 '기자질'을 했기 때문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한국의 찰스 피시먼이 탄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이 책이 내게 던진 화두는 그랬다.

월마트 문제점 정면으로 파헤친 저널리스트의 기록 ‘월마트 이펙트’

<월마트 이펙트>를 읽는 한국의 독자들이라면 롯데마트의 ‘통큰 치킨’ 논란을 떠올릴 것이다. 이 논란은 초반만 해도 대형유통업체들이 서민들의 골목상권까지 장악하려한다는 쪽에 초점이 맞춰지며 대기업에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비자들이 치킨을 싼 값에 사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는 대형마트 쪽 논리가 먹혀들기 시작했다. 이후 논의는 치킨 값 거품 쪽으로 급격히 틀어졌다. 초반 롯데마트의 부정적인 쪽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던 많은 언론들도 대형마트와 치킨업계 간 공방 쪽으로 보도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한국 언론이 사랑하는(?) 제1의 법칙인 중계보도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월마트 이펙트>는 한국 언론이 외면한 ‘통큰 치킨’ 논쟁의 핵심을 다루고 있다. ‘통큰 치킨’ 논란은 한동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최대 이슈였지만, 정작 대형업체의 저가 정책이 소비자들의 궁극적 이익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우린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은 많은 소비자들이 환호하는 대형유통업체들의 최저가 방침이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덫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팩트와 현장을 중시하는 저널리스트의 장기가 곳곳에 나타난다. 이 책이 가진 장점이다.

싸면 무조건 소비자에게 좋다? NO! 성공을 부르는 파산!

월마트의 최대 경쟁력은 경쟁사에 비해 제품 가격이 현격히 싸다는 것이다. 싸면 좋은 것 아니냐는 소비자들의 주장에 저자는 다양한 팩트와 사례를 들며 이렇게 말한다.

“월마트에서 당신이 싸게 싼 그 상품은 공급사를 끊임없이 압박해서 제조사가 울며 겨자먹기로 내놓은 가격”이라고.

예컨대 월마트에서는 1갤런(약 3.78리터)의 피클을 2.97달러에 팔았다. 1갤런은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소형 수족관 정도 되는 크기인데 “끈끈한 액체 속에 둥둥 떠다니는 통통한 녹색 피클들은 파충류를 방불케 하고 유리단지에 비쳐 실제보다 훨씬 커” 보이는 정도의 크기다. 상식적인 소비자라면 대체 이 많은 피클을 언제 다 먹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겠지만 일단 월마트에 진입하는 순간 이런 합리성은 ‘최저가 상품’에 점령당한다. 일단 ‘많은 양의 피클을 싼 가격에 사고 보자’는 심리가 압도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양의 피클을 싸게 구입할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니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맹점을 저자는 냉정하게 파고 든다. 월마트에서 ‘둥둥 떠다니는’ 1갤런 피클을 산 소비자들은 반도 먹지 못하고 버리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더니, 피클 제조사는 월마트 저가정책에 맞추기 위해 계속 낮은 가격에 피클을 납품하다 결국 파산의 길로 걷게 됐음을 강조한다. 그럼 소비자와 공급자가 모두 손해를 본 ‘저가 정책’의 최종 승자는 누구일까?

중간에서 ‘반강제적으로’ 피클을 싸게 팔도록 만든 월마트였다. 그렇다. 이 책은 월마트의 ‘저가 상품’이 공급자와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궁극적으로 ‘해’가 된다는 점을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다.

월마트의 저가 정책은 제3세계 국가와 환경오염에도 영향을 미친다

<월마트 이펙트>는 미국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랬다. 월마트가 한국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철수했던 ‘전력’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이런 생각이 참 순진했음을 알게 됐다. 월마트는 미국 뿐만 아니라 제3세계 국가의 경제와 환경오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게 연어다. 월마트가 연어를 싸게 팔기 시작한 후 연어 판매량이 미국에서 급증했는데 ‘문제’는 미국 소비자들이 즐겨 찾는 양식 연어의 65%가 칠레산이라는 점이다. 얼핏 보면 칠레산 연어가 미국에서 많이 팔리니까 칠레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 -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연어 양식은 칠레의 자급자족 농부와 어부들을 연어 가공 공장의 시간제 노동자로 바꾸었는데 ‘그들’의 노동환경은 상당히 열악하다.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위험한 일을 하고 있지만 저임금을 받고 있다. 게다가 연어 양식에 따른 환경오염도 심각하다. 거대한 바다 양식장에서 수억 마리 연어를 키우기 위해 엄청난 먹이를 준 결과, 연어 배설물이 해저에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또 칠레 연어 가공공장들은 연어 내장을 그대로 바다에 버렸는데 이로 인한 칠레 남부의 생태계와 환경파괴는 심각한 수준이다. 미국 소비자들이 싼 가격에 연어를 먹는 대가로 제3세계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환경오염이 발생하게 된다는 점을 <월마트 이펙트>는 담담히 보여준다.

월마트를 강하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소비자, 바로 우리들이다

그런데 월마트가 세계 경제에 미치고 있는 이런 영향력은 월마트 경영진의 능력 때문일까. <월마트 이펙트>의 저자는 ‘반드시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한다. 이른바 월마트 효과는 소비자들이 쇼핑하는 매장에서 시작돼 매장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월마트의 영향력은 월마트 매장에서 몇 달러씩 기꺼이 꺼내 소비하는 소비자들로부터 나온다는 얘기다.

물론 소비자들은 월마트에서 ‘싸게 산 제품’ 덕분에 연간 소비지출을 어느 정도 절약할 수 있음을 강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월마트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들 중에는 월마트 때문에 가난해진 미국의 2만 가구도 포함돼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좀 거칠게 말해, 월마트에 납품가격을 싸게 맞추기 위해 공급자들이 ‘파산’한 대가로 얻는 저가 상품이 소비자들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지 저자는 우리들에게 묻는다. 또 제 3세계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환경오염을 대가로 싸게 구입하는 제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되묻고 있다. ‘그렇게 해서’ 싸게 산 제품을 구입하는 ‘합리적 소비자들’ 아니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월마트 영향력만 키워주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 앞에서 할 말이 없어지는 이유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든 생각. 월마트를 한국의 유명한 대형마트 이름으로 바꾸어도 그렇게 큰 무리가 없을 거라는 것. 사람들이 최저가에 중독돼 있을 때 거대자본이 시장을 어떻게 파멸시키는 지를 <월마트 이펙트>는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우린 월마트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 대한 가해자인 셈이다.

<이미지=한겨레 2010년 12월14일자 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