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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흔적/숫자로 본 한 주간

‘도가니 열풍’이 ‘안철수 열풍’과 비슷한 이유

[숫자로 본 한 주간] 광주 인화학교 가해자들과 그 공범들

이번 한 주는 ‘7’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숫자로 뽑아 봤습니다.

영화 ‘도가니’가 우리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청각장애아동시설인 광주 인화학교 어린이들의 성폭행을 다룬 영화죠. 지난 22일 개봉 6일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사건 재조사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서명도 사흘 만에 5만 명을 넘었습니다. 아동 성범죄 공소시효 폐지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경찰이 영화 개봉 7일 만에 전면 수사에 착수했는데요, 오늘은 영화 ‘도가니’ 열풍에서 우리 사회가 무엇을 점검하고 반성해야 하는지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영화 개봉 7일 만에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것은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영화도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영화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해 준 사건이었습니다.

정치권과 언론의 뒤늦은 ‘도가니’ 열풍 불편하다

지금 정부를 비롯해 여야 정치권, 언론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도가니 열풍’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과 재발방지를 약속하는가 하면, 제2의 피해가 없도록 이른바 ‘도가니 방지법’ 제정도 서두르고 있죠. 그런데 저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정부와 정치권, 언론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봅니다. 바로 자기반성입니다.

광주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은 2005년에 발생했는데 지금까지 정부와 정치권, 언론이 사태해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엄밀히 말해 정부나 정치권, 언론이 해야 할 일을 공지영 작가와 영화 제작진이 대신한 셈입니다. 상황이 이러면 일단 자성과 사과가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다들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가해가 처벌’과 ‘재발방지’를 강조합니다. 정치권과 언론의 ‘도가니’ 열풍이 불편한 이유입니다.

영화 ‘도가니’ 열풍으로 광주 인화학교 문제가 최근에 알려졌지만 진상조사와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 항의농성은 오래전부터 계속됐습니다. 시민대책위원회가 법인 임원 해임 등을 촉구하며 242일간 농성을 하기도 했고, 학생들이 66일간이나 등교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됐지만 교육당국은 수수방관으로 일관했습니다. 인화학교 사태에서 교육당국은 사실상 가해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교육당국과 한나라당은 사실상 가해자와 공범이나 마찬가지

한나라당도 책임을 피하긴 어렵습니다. 현행 사회복지사업법에 따르면 사회복지법인 이사회는 공익이사를 선임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렇다보니 상당수 사회복지법인이 친인척과 지인 등 족벌체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인화학교만 해도 재단 설립자의 큰 아들이 교장, 작은 아들이 행정실장이었는데 이들이 바로 성폭행의 주범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정부가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복지재단을 운영하는 종교단체들의 반발 때문에 법안 통과가 무산됐습니다. 한나라당이 ‘가해자 처벌’ 목소리를 내기 전에 반성부터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나라당 책임이 크긴 하지만 국회의원들도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광주 인화학교 사건에서 일부 가해자는 성폭력 특례법 제6조에 있는 ‘항거 불능’ 조항 때문에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1·2심 재판부가 “장애인들의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변호할 수 없는 미성년 장애인에게 범죄 피해 입증 책임을 지우도록 한 것이 온당한 결정일까요.

이런 점 때문에 사법부의 판결에 대해 비판이 잇따랐고 논란이 증폭됐습니다. 최영희 민주당 의원이 2010년 10월 ‘항거불능’ 표현을 삭제하는 내용의 성폭력 특례법 개정안을 제출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1년 동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국회가 외면했다는 얘기입니다.

제도권에 대한 불신과 반발 - ‘도가니 열풍’과 ‘안철수 열풍’은 닮았다

한 마디로 책임 있는 사람들이 그동안 사태해결을 위해 전혀 움직이지 않다가 ‘뒷북대응’ 했다는 얘기입니다. 때문에 저는 정치권이 ‘도가니 열풍’의 본질적인 측면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가니 열풍’은 기본적으로 성폭행한 교사와 이를 은폐한 재단에 대한 분노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사와 재단에게만 책임을 돌릴 순 없습니다. 사태해결을 외면했던 정부와 정치권, 언론은 물론이고 사법부와 종교단체, 지역사회 특권층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영화 ‘도가니’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가해자들과 한 통속이 된 공무원들의 부패와 무사안일주의, 상식을 벗어난 종교집단의 태도, 무기력한 사법부의 모습까지. 한마디로 ‘도가니 열풍’의 근원에는 기득권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인 불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안철수 현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처럼 ‘도가니 열풍’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가니 열풍’과 ‘안철수 열풍’과 그런 점에서 참 많이 닮았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정부와 정치권이 늦게라도 사태해결에 나선 건 다행이지만, 먼저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한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반짝’ 관심으로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미지(위)=경향신문 2011년 9월29일자 1면>
<이미지(중간)=한겨레 2011년 9월28일자 3면>
<이미지(아래)=경향신문 2011년 9월29일자 2면>

※ 이 글은 2011년 10월1일 오전 6시10분부터 7시 사이에 CBS FM(98.1MHz) ‘좋은 아침 최정원입니다’에서 방송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